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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가자

서울역사박물관 관람기_(상설전시) ① 조선시대의 서울

by 인왕산 고양이 2024. 11. 24.

가끔 서울역사박물관을 가면 1층 기획전시만 보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은 근방으로 가는 경우가 오로지 박물관을 가기위해서 가는게 아니다보니 친구 기다리다가 시간이 좀 남거나 할때 1층만 잠깐 보고 나오곤 했어서 윗층에 있는 상설전시관을 가보질 못했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3층 상설전시관을 갔다왔는데 생각보다 더 유물도 많고, 스토리텔링도 좋았어서 서울사는 시민으로서 너무너무 뜻깊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전시는 시대 순으로 총 4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① 조선시대의 서울(조선 건국 후 한양 정도(定都)부터 개항 이전까지)
② 개항, 대한제국기의 서울(19세기 중반~ 대한제국)
③ 일제 강점기의 서울(1904~1945년 식민지시대)
④ 대한민국 수도 서울(해방 이후~)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이전되면서 서울의 역사는 시작된다.

 

한성부의 공식 행정 구역인 오부와는 별개로 도성 안은 지세와 수계를 중심으로 북촌, 남촌, 중촌, 동촌, 서촌(웃대), 아랫대의 지역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들 지역은 자연 경관과 입지 조건, 거주자들의 신분적 특성에 따라 각각 지역문화 양상이 달랐다.

당시 한양을 지역별로 7개로 나누어 불렀는데 지역색이 박물관 전시를 보면서 지역색들이 뚜렷한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고위양반들의 베이스캠프, 북촌(北村) 

북촌은 고위 관직에 있으며, 재산과 학문적 소양을 두루 갖춘 양반들의 중심 터전이었다고 한다. 한양에서 대대적으로 부귀를 누리던 사대부의 마을이 바로 북촌이었다.

백악산과 인왕산을 랜드마크 삼아 그곳에 정자를 짓고 풍류를 읆었으며, 북촌 골목에는 양반의 심부름을 하는 겸인과 노복들이 생활하는 현장이기도 했다. 또한 정치가들의 동네 답게 권세가들의 대립과 갈등도 빈번했던 지역이라고 한다.

 

안동김씨 하면 조선시대 세도정치의 대표적인 집안이다. 안동김씨의 세도정권 기반을 마련한 김조순의 문집 풍고집이라고 한다. 옆에는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이 사용했던 관복 장식 보관함이다. 오랫동안 정권을 잡고 있던 세력있는 양반가의 기운이 느껴졌다.

 

한양 최고의 명승지들이 모여있는 서촌(西村) 

서촌은 백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하는 경복궁 서쪽 지역을 말한다. 백악산과 인왕산이 이어지는 산세가 도성 내 최고의 명승지로 손꼽히는 만큼 왕족과 권력층의 세거지였다. 또한 왕궁이 있는 육조거리와 가까워 서리(胥吏), 녹사(錄事) 등의 하급 관리인 아전(衙前)들도 많이 산 지역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산세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니 만큼, 봄철 한양의 꽃구경 명소가 많은 덕택에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등의 모임 결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조선후기 중인들의 풍류와 문예를 꽃피우던 여항문학운동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다. 이 지역 출신중에 진경산수화의 대표적인 인물인 겸재 정선이 있다고 한다.

서촌지역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지역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그림첩과 시들이다. 이곳에서는 백전이라는 백일장도 있었는데 중인 지식인들이 수백명씩 참여했었다고 한다. 시를 지어 당대 문장가들에게 품평하러 했는데 으뜸으로 뽑힌 글은 그날 장안에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에게 읽혔는데 시축이 헤질때쯤 주인에게 돌아왔다고 한다. 또한 당대 재상들도 백전에 품평을 맡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김홍도가 그린 송석원시사의 연회 모습이라고 한다. 멋진 자연경관과 거기에 빠진 사람들이 모인 서촌은 정말 낭만있는 곳이었을 것 같다. 

 

성균관이 있던 한양의 동쪽, 동촌(東村)과 아랫대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명나라 유민들의 마을 명인촌 이 있던 지역이라고 한다. 성균관이 있었다고 해서 그런가..대학로 이미지가 느껴진다.

시를 짓는게 양반과 중인들만의 문화일거라 생각했는데 성균관 공노비들의 시를 모은 시집도 있었다. 조선에 노비 신분인데도 시를 잘 짓기로 유명했다는 정초부가 생각이 났다. '시를 잘 짓는 나무꾼'으로 유명했다는데, 특히 과거시험용 과시에 특출나서 주인집 자제들이 과거 급제를 도와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덕분에 노비에서 벗어나 양인으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이 후로도 전처럼 나무를 해야 할만큼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를 글재주가 뛰어나도 취미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전문직 중인들의 마을, 중촌(中村) 

현재의 청계천 일대는 근처에 궁궐과 주요 관청, 시전이 있어 생활이 편리한 곳이었다고 한다. 주로 역관, 의관, 율관 등 관청의 서리급 중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양반들은 그들을 빗대어 "수단과 방법을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챙기고 문학을 가벼이 여긴다고 표현했지만 현재 시대로 보면 똑똑한 전문직들이 모여사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천문학 서적과 별자리 모형, 해시계다.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이다.

현대에서는 최고의 직업 중 하나로 꼽는 의사가 옛날엔 중인들의 직업이었다니..시대를 잘 타고나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

 

청렴한 양반들의 마을, 남촌(南村)  

북쪽에는 궁궐과 주요 관청들이 있던 반면 남촌은 일반 관청이나 군영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권력에서 주로 소외된 청렴한 선비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기도 하다. 

세력에서 조금 소외가 되었어도 끊임없이 교류하고 시를 지었던 남촌 출신 양반들..
남촌의 대표적인 명문가 회동정씨 정여찬이 조광조, 이황, 송시열 등과 나눈 편지를 묶은 책이라고 한다. 

 

한양 지역별로 이렇게 개성이 강한지 처음 알아 매우 흥미롭게 구경했다. 1관에서는 그밖에 육조거리, 시장 풍경, 조선시대 관직등 더 다양한 유물들이 많아서 굉장히 오랜시간 구경을 했다.